룩소르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나일 강 상류 남쪽에 테베라는 도시가 있다.
이 도시는 고대에는 룩소르로 불렸으며 이집트 신왕국 시대의 수도였다. 카르낙 신전, 룩소르 신전 등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신전들이 도시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어, 일찍이 고대 그리스 시인 호머는 룩소르를 '백 개의 문이 있는 테베'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궁전의 도시’라는 뜻의 룩소르란 이름이 붙여졌다. 룩소르는 대 피라미드군이 있는 카이로 인근의 기자와 더불어 이집트 최대의 관광 명소이다.
생명의 땅과 죽음의 땅
룩소르를 지나는 나일 강의 동쪽은 태양이 떠오르는 곳으로 왕궁과 신전이 위치하여 '생명의 땅'이라 부른다. 서쪽은 왕가의 계곡, 왕비의계곡, 귀족의 계곡 등으로 이어진 지하 고분군이 위치하여 '죽음의 땅'이라 부른다. 피라미드 또한 모두 서쪽에 위치한다. 이 가운데 왕가의 계곡은 파라오들의 공동묘지라 할 수 있다. 현재 투트모세 1세, 투탕카멘, 람세스 3세, 람세스 6세 등 파라오들의 고분들이 계곡의 깊은 암굴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가장 마지막에 매장된 파라오는 람세스 11세이다.
힉소스인에게 무릎 꿇은 파라오
피라미드는 신이었던 파라오의 절대 왕권을 상징한다. 그렇지만 제5 왕조 이후 왕은 절대적인 신적 존재가 아니라 그들이 믿는 태양신의 아들일 뿐이라는 의식이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왕권이 쇠퇴하면서 피라미드에 대한 정열도 식어 갔다.
특히 기원전 1674년, 이집트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말과 전차 그리고 초승달처럼 휘어진 칼인 언월도로 무장한 힉소스인(힉소스는 '외국에서 온 지배자'란 뜻)에게 파라오가 무릎을 꿇으면서 250년간 힉소스인에 의한 제15왕조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를 목격한 귀족과 평민들에게 파라오의 절대 권위는 더 이상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신의 영역이 아니었다. 파라오만이 부활한다는 불멸사상이 귀족과 평민에게 퍼지면서 부를 축적한 귀족과 평민도 너나 할 것 없이 작고 수많은 피라미드를 세웠다. 고왕국 시대에 파라오의 권위를 상징하던 피라미드가 그 지위를 잃은 것이다.
죽음의 땅이 생겨난 이유
피라미드 대부분은 쉽게 도굴되었다. 그러자 파라오들은 도굴을 염려하여 깊은 산중 협곡의 암벽을 뚫고 아무도 모르는 지하 세계에서 내세를 추구했다. 멀리서 보면 피라미드 형상이지만 사람들의 접근이 없지 않아 도굴이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여 지상이 아닌 깊은 계곡의 지하에 무덤을 만든 것이다. 무덤을 만들었던 인부들도 일이 끝난 후에는 모두 죽일 정도로 비밀을 철저히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허사가 되어 고대 이집트 왕릉 대부분이 도굴되었다.
죽음의 땅에 위치한 지하 고분은 초기에는 모두 도굴된 상태였다. 그렇지만 1922년 하워드 카터가 발굴한 투탕카멘의 무덤만은 원형 그대로 발견되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투탕카멘의 무덤이 도굴되지 않은 이유는 다음 시대의 무덤을 만들기 위한 일꾼들의 집이 그 무덤 위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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